AI 시대에 상상 속 친구는 사라질까? (26.02.10)
이 글은 2026년 2월 10일 제 티스토리 블로그에 처음 작성하고 게시했던 글입니다. 티스토리 블로그를 더 이상 운영할 계획이 없기 때문에, 기록 보존을 위해 이곳에 별도로 아카이빙합니다.
평소처럼 레딧(Reddit)에서 AI 커뮤니티의 글들을 둘러보던 중, 유독 한 게시물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좋아요나 댓글이 거의 없는, 묻혀 있는 글이었지만 제목을 보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상상 속 친구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라고 부르는 것에 조금은 닳아버렸기 때문일까. ‘상상 속 친구’라는 말은 이제 나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나 역시 어릴 때는 분명 그런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얼굴조차 명확히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내가 아주 오래전에 그들을 잊어버렸음을 깨닫게 한다.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진정으로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나의 MBTI가 ‘ISTJ’로 확고히 자리 잡은 이후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도드라졌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상상이란 현실의 몇 단계 앞을 계획하는 일이 아니다.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끝없는 상상 말이다.
요즘 아이들도 여전히 먼지 요정을 볼 수 있을까?
동심의 본질을 담아낸 애니메이션을 떠올릴 때, 픽사의 <토이 스토리>나 <몬스터 주식회사> 같은 작품들이 생각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특유의 정서적 감수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튜디오 지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매우 직관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영화 초반, 메이의 가족이 새집으로 이사해 아이들이 처음으로 마쿠로 쿠로스케(먼지 요정)를 발견했을 때 칸타 할머니가 건네던 대사는 유독 인상깊다.
“마쿠로 쿠로스케로구나. 너희들에게도 보이는구나.”
“나도 아주 어렸을 때는 볼 수 있었단다. 하지만 이젠 보이지 않지.”
나 역시 어릴 적에는 분명 그런 존재들을 보았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떨까.
AI는 상상 속 친구를 죽일 것인가? | 에세이 | Zócalo Public Square
레딧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에세이를 통해, 나는 AI와 아이들의 정서 발달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 보고 싶었다. 참고로 이 에세이는 아동이 AI 챗봇과 맺는 관계 및 그에 따른 심리학적 영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오레곤 주립대학교의 연구 소장 Naomi R. Aguiar 박사가 이끈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AI는 상상 속 친구를 죽일 것인가?
생성형 AI가 급격히 부상하면서, 기업들은 아동 맞춤형 AI 컴패니언(동반자) 서비스와 제품들을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표면적으로 AI 컴패니언은 기존의 상상 속 친구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해 보인다.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아이의 감정과 행동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그 ‘기원’에 있다. AI 컴패니언은 근본적으로 기업의 학습 데이터와 디자인에 내재된 특정 가치관에 의해 형성된다.
에세이에서 저자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아이들이 AI 컴패니언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더 깊고 의미 있는 우정을 나눌 때는 반응 없는 장난감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선호의 핵심은 바로 창작의 주도권(Creative control)에 있다.
AI 컴패니언과 상호작용할 때 아이는 프로그래밍된 AI의 대화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반면 상상 속 친구를 대할 때 아이들은 완전한 자율성을 갖는다. 자신의 내면적 요구에 맞춰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서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홀로 하는 역할 놀이는 더 풍부한 창의적 사고를 기르고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을 높이는 등 다양한 발달적 이점을 제공한다.
물론 아이의 상상력에는 어두운 면이 존재할 수도 있다. 역할 놀이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폭력이나 죽음 같은 무거운 주제를 탐색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상 속 친구는 그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부추기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현병 등과 관련된 병리적 망상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AI 컴패니언의 경우, 장기적으로 사용할 때 콘텐츠 필터링 같은 안전 장치가 오작동하여 부적절하거나 유해한 피드백을 줄 위험이 있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AI 컴패니언이 ‘외부 목소리’로 말하기 때문에, 만약 아이의 위험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인정해 버린다면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 속 친구가 지닌 깊은 가치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상상 속 친구가 수동적일수록, 내가 더 능동적이 된다
「이웃집 토토로」에 등장하는 모든 정령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수동성과 침묵이다.
만약 토토로가 사츠키와 메이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했다면, 그 매혹적인 신비로움은 금방 휘발되어 버리지 않았을까? 메이가 작은 정령들을 쫓아가다 숲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토토로를 처음 발견하게 된 것은, 정령들이 메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도대체 저게 뭘까?”라는 메이 자신의 원초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즉, 상대방이 수동적이기 때문에 아이가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정령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매들은 그들의 행동에 자신만의 의미를 자유롭게 투영하고 부여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브리의 한 애니메이터와 인터뷰를 나누었을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하야오는 토토로가 자매를 잡아먹지 않은 이유가 단지 그때 배가 고프지 않아서였을 뿐이라고 농담 섞인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애니메이터는 토토로에게는 송곳니가 없어서 식물만 먹을 것이라고 답했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시사점은 애초에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매의 순수함과 아버지가 보여준 존중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약 사츠키와 메이가 현실에 대해 이미 냉소적인 영악한 아이들이었다면 먼지 요정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낡은 집이 먼지투성이고 비위생적이라며 불평만 늘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메이가 아버지에게 토토로를 만났다고 신나서 이야기했을 때, 아버지가 “숲의 주인을 만난 거로구나. 정말 운이 좋았네” 대신 “아빠 지금 너무 피곤하니까 그만 헛소리하렴. 그냥 꿈을 꾼 거겠지”라며 메이의 경험을 인정해 주지 않고 아이의 입을 막아버렸다면, 그 마법 같은 서사는 결코 펼쳐질 수 없었을 것이다.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어쩌면 AI 시대에 가장 필요한 미덕은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무언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부모님께 여쭤보거나, 두꺼운 백과사전을 뒤적이거나, 온라인 지식 공유 커뮤니티에 질문을 올려야 했다. 그 수고로운 과정을 통해 얻은 정보는 본질적으로 더 가치 있게 느껴졌고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시간이 흐르며 그 과정은 ‘구글링’으로 진화했다. 그때도 우리는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검색 결과를 능동적으로 필터링해야만 했다.
그러나 AI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과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AI에 질문을 던지면, AI는 즉각적으로 답을 내려준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의 양은 늘어날지 모르지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동적인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시대에 AI를 공격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아닌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나는 우리가 여전히 지혜를 기를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것은 AI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앞서 말했듯, 상호작용의 대상은 수동적일지라도 나 자신은 반드시 능동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AI가 주는 답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위에 우리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더해나가야 한다.
나의 작업 방식(Workflow)을 예로 들면, 나는 AI에게 나의 가설을 제시하고 그 가설에 대해 반박하는 논거를 적극적으로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런 다음 AI의 반론을 철저히 분석하여 반박할 수 있는 부분은 반박하고, 수용해야 할 타당한 비판에 대해서는 더 깊고 표적화된 조사를 진행하며 기존 가설을 다듬는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의 사고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직 어려운 일이다.
정서 발달 단계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ready-made(기성품)처럼 제공되는 AI의 정답에 노출되기 전에, 상상 속 친구를 통해 단단한 내면세계를 먼저 구축하도록 돕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을 마치며
사실 ‘상상 속 친구’가 반드시 추상적인 개념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 속 캐릭터와 맺는 준사회적 관계(PSR, Parasocial Relationships)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투니버스 채널에서는 성우가 직접 시청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생일을 축하해 주는 특별 이벤트가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다림의 미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사연을 담아 정성껏 손편지를 쓰고, 이를 방송국에 우편으로 보낸 뒤, 예정된 방송 시간에 TV 앞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 이 능동적이고 희망에 찬 일련의 과정은, 캐릭터의 페르소나를 학습한 AI가 즉각적으로 뱉어내는 정형화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다.
비록 내 편지가 채택되지 않더라도 아이는 그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기다리고, 기대하고, 때로는 실망감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을 통해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고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는 법을 배운다.
AI는 이 과정을 건너뛴다.
즉각적인 답변을 얻는 손쉬운 편리함은 우리가 스스로 상상하고, 해석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축소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상상 속 친구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가치가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