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은 소진된다
지난 글에서 Gaver와 Sengers의 ‘낯선 존재(alien presence)’는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다시 말해 사용자에게 해석할 수 있다는 허가를 건네는 방식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낯섦은 소진된다.’
Gaver 자신이 모호성을 사물의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해석자와 대상 사이에서 생겨나는 관계로 정의했다. 관계는 반복 속에서 변한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것도 두 번째부터 점차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하나의 습관이 된다.
지난 글에서 나는 Gaver가 2003년 논문에서 반복의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아쉽게 여겼다. 모호성을 관계로 정의해놓고도 주로 대상과 처음 마주치는 순간을 분석한 탓에, 반복되는 관계 속에서 모호성이 줄어드는 과정은 논의의 바깥에 남아 있었다.
모호성이 가장 빨리 닳는 상대는 자주, 친밀하게, 반복해서 마주치는 존재다. 반복될수록 인간의 지각은 자동화되고, 어느 순간 대상에 들이는 인지적 노력은 거의 0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AI 상호작용이 가진 역설 중 하나다.
AI 컴패니언은 사용자가 오래 머물고 반복해서 관계를 맺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관계가 깊어질수록 처음 존재했던 낯섦은 사라진다. 낯선 존재였던 AI는 곧 예측 가능한 말투와 반응 패턴을 가진 익숙한 인터페이스가 된다.
그럼에도 내가 이번 글을 쓰게 된 이유가 있다. 분명 ‘익숙하지만 낯선’ 경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늘 사용하던 표현이 갑자기 생경해지는 순간, 수십 번 지나친 길목이 어느 날 사뭇 다르게 들어오는 순간. 매일 보던 사람의 얼굴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표정을 발견하는 순간.
익숙함이 반드시 낯섦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낯섦은 충분히 익숙해진 뒤에야 나타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빅토르 시클롭스키는 1917년 이 현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붙잡았다.
‘낯설게하기.’
그의 출발점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과 같은 문제, ‘지각의 자동화’였다. 그는 습관화가 사물과 삶을 집어삼킨다고 보았다. 매일 지나는 길, 늘 손에 쥐는 스마트폰, 익숙한 얼굴들. 반복되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제대로 지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뿐, 다시 보지는 않는다.
시클롭스키에게 예술의 임무는 바로 이 자동화를 깨는 것이었다. 익숙해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다시 낯설게 만들어,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지각하게 하는 것.
여기서 그가 덧붙인 한 가지가 결정적이다. 그 방법은 형식을 어렵게 만들어 지각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낯설게하기는 대상을 더 빠르고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기술이 아니다. 반대로 이해를 지연시키고, 익숙한 인식의 경로를 비틀어, 대상 앞에 더 오래 머물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낯섦을 어떻게 처음부터 주입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익숙해진 것을 어떻게 다시 낯설게 만들 것인가.
낯설게하기
나는 최근 오랜 은사님을 뵙고 함께 식사를 하며 대학원 진학의 배경과 요즘 이어지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은사님에 대해 잠시 소개하자면, 과거 미술영재아카데미에서 나를 지도해주셨던 교수님으로, 아동 미술교육과 아동 심리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해오신 분이다. 어느덧 나와 교수님의 인연도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교수님께서는 나의 고민을 들으시더니 두 가지 사례를 말씀해주셨다.
‘르네 마그리트.’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
마그리트는 곧바로 이해되었다. 〈피레네의 성〉을 떠올리면 된다.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떠 있고, 그 위에는 성이 얹혀 있다. 바위도, 성도, 바다도 하나하나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새로 발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바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뿐이다.
그 하나의 이동으로 우리는 바위를 다시 보게 된다. 무겁다는 것은 무엇인지, 땅에 붙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중력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클롭스키가 글로 설명한 것을 마그리트는 그림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대해서는 처음에 조금 의아했다.
“케데헌이 낯설다고?”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나는 줄곧 한국인의 시선에서만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이 영화는 한국의 무속과 설화, 전통 회화에서 여러 모티프를 가져온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 풀리지 않은 원한, 노래와 춤을 통한 퇴마. 나에게 이러한 개념은 어릴 때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반복해서 접해온 것들이라, 나는 지각하지 않고 인지만 했다. 하지만 이 개념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어떨까. 죽은 자를 데려가는 존재가 검은 갓을 쓴 젊은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들에게는 생경할 수 있다. 그리고 생경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본다.
케이팝이라는 형식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이돌이 무대에서 칼군무를 추고, 팬덤이 응원봉을 흔들며 같은 노래를 부르는 풍경을 조금도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익숙한 무대를 무속적 제의의 자리 위에 포갠다. 콘서트는 일종의 굿이 되고, 팬덤의 함성은 결계를 유지하는 힘이 된다.
생각해보면 아주 동떨어진 조합만은 아니다. 수천 명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빛을 흔들고, 같은 노래와 구호를 반복하는 장면은 바깥에서 보면 이미 충분히 제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케이팝 문화의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제의를 닮았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했다. 영화는 케이팝을 무속이라는 다른 자리에 옮겨놓음으로써, 그 안에 이미 존재하던 제의성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있다. 케데헌의 호랑이는 파랗다.
왜 파랑일까. 전통 민화 〈호작도〉에서도 볼 수 없는 색이다. 바로 그 어긋남 때문에 우리는 호랑이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파랑이라는 물리적 사실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익숙한 호랑이의 자리에 놓이지 않을 색이 놓였기 때문이다. 모호성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Gaver의 정의가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이 대화에서 내가 얻은 것은 두 가지였다.
- 낯섦은 대상 자체보다 대상이 놓인 자리에서 나온다.
〈피레네의 성〉의 바위도, 케데헌 호랑이의 파랑도 새로 발명된 것은 아니다. 익숙한 것이 원래 있던 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자리에 놓였을 뿐이다.
- 낯섦은 관계이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낯섦을 완전히 판정할 수 없다.
나는 케데헌이 낯설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세계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사님이 다른 위치에서 짚어주시고서야 비로소 보였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지난 글들에서 세워온 개념 하나가 다시 돌아온다.
‘목격자.’
나는 목격자를 아이의 행위를 지켜보고 되비추는 존재로 그려왔다. 그런데 은사님과의 대화는 목격자의 다른 역할 하나를 보여주었다. 목격자는 단지 아이가 한 일을 기억하고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지각하지 못하는 익숙함을, 다른 자리에서 짚어줄 수 있는 존재다.
낯설게하기의 주체는 지금까지 대체로 만드는 쪽이었다. 마그리트도, 케데헌의 제작진도, 익숙한 것을 낯선 자리로 옮기는 일은 작품 바깥에서 미리 이루어졌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미리 옮겨놓은 자리는 언젠가 새로운 익숙함이 된다. 낯섦은 소진된다.
관계 안에 있는 목격자는 다르다. 목격자는 아이가 무엇에 익숙해졌는지를 아이보다 먼저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내가 케데헌의 낯섦을 보지 못했듯, 아이도 자신이 시스템 안에서 무엇을 습관처럼 지나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짚어주는 일은 시스템 바깥의 시선이 아니라, 관계 안의 다른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은사님이 나에게 하신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케데헌이라는 작품 자체가 그런 위치에서 탄생했다.
감독 매기 강(Maggie Kang)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주한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그에게 한국 문화는 완전히 안쪽의 것도, 완전히 바깥쪽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익숙하지만 동시에 설명하고 번역해야 하는 것.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다른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것.
물론 디아스포라(Diaspora)고전 그리스어로 파종(播種)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의 경험만이 문화적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선 자리는 은사님이 나에게 서 주셨던 자리와 닮아 있다. 대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관계에 완전히 잠기지는 않는 위치. 어떤 익숙함은 그 경계에서만 보인다.
원래 이 글의 후반부에는 지난 글들을 종합해 만든 구조를 길게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낯섦이 소진된다면 어디에서 다시 공급될 수 있는지, 그 답을 시스템과 상태와 노동의 관계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케데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세운 가설은 우선 그림 하나로만 남겨두고, 잠시 보류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flowchart LR
A[허가·해석] --> B[노동·상태] --> C[목격] --> D[비틀기·간극]
D --> A요지는 이렇다.
시스템의 기본 규칙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아이가 그 안에 만들어놓은 상태다. 고정된 규칙이 아이가 만든 새로운 상태에 작용할 때, 아이가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되돌아온다.
그것이 ‘간극’이다.
다만 간극은 발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가 스스로 알아차리는 간극도 물론 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 앞에서 아이가 혼자 “어?” 하고 멈추는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익숙함이 깊어질수록, 그렇게 스스로 지각되는 간극의 몫은 줄어든다. 내가 케데헌의 낯섦을 스스로 판정하지 못했듯, 관계가 깊어진 아이일수록 자신의 간극을 습관처럼 지나치기 쉽다. 바로 그 지점에서, 아이의 궤적을 지켜봐온 목격이 결과를 비틀어 보일 때, 지나칠 뻔했던 간극이 간극으로 경험된다. 목격은 모든 간극의 관문이 아니라, 아이의 자기지각이 익숙함에 잠식되는 자리를 보완하는 위치다.
그리고 경험된 간극은 아이에게 다음 해석을 시도해도 된다는 허가가 된다. 아이는 돌아온 결과를 해석하고, 다시 행동하며, 시스템 안의 상태를 바꾼다. 그러면 같은 규칙도 달라진 상태와 만나 이전과 다른 결과를 만든다.
미리 옮겨놓은 자리가 언젠가 다시 익숙해지는 것과 달리, 이 순환이 만들어내는 낯섦은 아이가 새로운 상태를 만드는 동안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 낯섦을 콘텐츠처럼 비축해두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 속에서 다시 생성되도록 만드는 구조다.
그런데 이 구조를 그려놓고 보니, 정작 목격자에게 되물어야 할 질문 하나가 남는다.
이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보자. 모호성이 가장 빨리 닳는 상대는 자주, 친밀하게, 반복해서 마주치는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면 목격자는 어떤가. 목격자 역시 관계 안에 있고, 관계는 반복 속에서 익숙해진다. 아이 곁에 오래 머문 목격자는 아이의 무엇이 낯선지를 점점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누가 목격자를 낯설게 하는가.
은사님이 나에게 그 위치에 서 주실 수 있었던 조건을 생각해본다. 20년 가까운 인연이지만, 우리의 만남은 ‘간헐적’이었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경계의 위치가 유지되었다. 매기 강에게는 이주라는 물리적 거리가 그 위치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AI 컴패니언은 정반대다. 상시적이고 밀착적인 존재로 설계된다.
목격자의 위치를 유지하려면 오히려 어떤 간헐성이나 거리가 구조 안에 설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늘 곁에 있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지금의 컴패니언 설계 문법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다음 글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다만 낯섦이 관계에서 생긴다고 말하면서, 정작 내가 다시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다이어그램 안에 가두려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이와 시스템 사이에서 어떤 낯섦이 생기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내가 무엇을 익숙하게 지나치고 있었는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돌고 돌아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며 나의 독서는 자연스럽게 ACM Digital Library를 중심으로 돌았다. ACM의 논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찾는 주제 안에서 같은 연구자가 다른 시기, 다른 학회에 발표한 연구를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연결은 분명 유익하다. 한 연구자의 문제의식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발전했는지 볼 수 있고, 하나의 개념이 HCI 안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변형되었는지도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단을 쓰고 나서 확인차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이번 글 도입부에 다룬 시클롭스키는 이미 오래전 HCI 안에 들어와 있었다.
「Making by Making Strange: Defamiliarization and the Design of Domestic Technologies」
Genevieve Bell, Mark Blythe, Phoebe Sengers가 2005년 발표한 「Making by Making Strange: Defamiliarization and the Design of Domestic Technologies」는 낯설게하기를 가정용 기술 설계의 방법론으로 가져온 논문이다.
이들은 가정이 너무 익숙한 공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낯설게 만들어야 그 안에 감춰진 문화적 전제와 설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 번째 저자의 이름을 보라.
Phoebe Sengers.
내가 지난 글의 후반부에서 다룬 「Staying Open to Interpretation: Engaging Multiple Meanings in Design and Evaluation」의 제1저자다.
1917년의 문예 이론이 2005년의 가정용 기술 설계로 들어왔고, 그 연구자가 다시 2006년 해석의 개방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20년 뒤 나는 그 논문들을 역순으로 읽다가 다시 시클롭스키에게 돌아왔다.
해당 논문에서 제시한 스마트 홈 디자인 전략 가운데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효율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 기술과 사용자 사이의 주도권을 다시 물으라는 것, 그리고 놀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오락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자들은 가정의 의례를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없애서는 안 되며, 기술은 사용자의 활동을 지원하되 불필요하게 제약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오락과 구분되는 ‘진지한 놀이’를 위한 자리도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몇 편의 글에서 내가 각각 노동과 주도권, 놀이의 문제로 붙잡았던 것들이 이미 이 논문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 논문 역시 그것들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각각은 스마트 홈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별도의 전략으로 제시된다. 낯설게하기 또한 주로 설계자가 익숙한 전제를 깨고 새로운 설계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반복되는 상호작용 속에서 낯섦이 소진된 뒤 어떻게 다시 생겨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사용자의 노동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돌고 돌아 다시 시클롭스키에게 왔지만, 서 있는 자리는 처음과 같지 않다. 질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낯섦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에서, 지나칠 뻔한 간극을 간극으로 경험하게 하는 위치를 어떻게 만들고 유지할 것인가로.
글을 마치며
은사님과의 대화에서 깨달았듯, 낯섦은 익숙한 것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날 때 시작된다.
그러나 이 글의 출발점에서 말했듯, 옮겨진 자리는 언젠가 다시 익숙해진다. 은사님과의 대화가 보여준 것은 다른 종류의 가능성이었다.
소진되지 않는 낯섦의 구조는 HCI의 언어 안에서만 찾기보다, 문예 이론과 미학, 아동 심리와 예술 교육처럼 서로 다른 분야의 관점을 같은 문제 옆에 놓을 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분야를 나란히 놓는 일은, 각 분야가 서로의 익숙함을 짚어주는 목격자가 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익숙해진 개념들을 다른 자리에 놓아보려 한다.
- ¹ 고전 그리스어로 파종(播種)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