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타인에게 건네는 일

논문, 쓰다

『논문, 쓰다』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논문도 하나의 스토리텔링이며, 이야기의 흐름과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질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떤 생각과 근거를 거쳐 논의가 이어지는지 독자가 따라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생각은 이번 견해를 작성하는 방식에도 분명한 영향을 주었다. 책에서 와닿았던 대목들은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 지금 붙들고 있는 연구 질문, 그리고 그 질문을 갖기까지의 경험과 맞닿아 있었다. 그 과정을 따라가며 책의 내용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써보고자 한다.

논문을 쓴다는 것 자체가 적극적인 공동체 행위인 것이다.

내가 대학원에 왜 진학했는지 다시 돌아보았다. ‘연구가 하고 싶었다.’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막상 연구가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니 그 범위가 너무 넓었다. 혼자 책을 읽고, 작업을 하고, 어떤 질문을 오래 붙드는 일도 연구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왜 굳이 대학원에 들어왔을까. ‘나는 왜 연구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나는 왜 이 공동체를 택했는가’로 바꾸자, 내가 원했던 것이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고, 자신이 얻은 지식과 경험을 나누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해왔다. 생각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만의 생각이라고 여겼던 것조차 누군가가 만든 언어와 앞서 던진 질문 위에서 이루어진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것은 논문을 쓰는 방법에 앞서, 그것을 쓰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개인이 이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논문이라는 글도 다르게 보였다.

그렇다고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만으로 내가 대학원을 선택한 이유가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는 내 생각을 더 깊이 밀고 나갈 시간과 함께, 그 생각에 질문을 던져줄 사람들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충분하다고 여겼던 설명이 누군가에게는 불충분할 수 있고, 중요하다고 믿었던 문제가 다른 관점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연구가 하고 싶었다’라는 말에는 그런 만남을 통해 내 생각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논문을 쓴다는 일의 의미도 달라졌다. 논문은 내가 알아낸 것을 정리하는 글이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 내놓는 글이다. 내 안에서는 분명했던 생각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려 하면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왜 이 질문이 중요한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앞선 논의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아는 것뿐 아니라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것까지 마주하게 된다. 논문 쓰기가 적극적인 공동체 행위라는 말은,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건네고 그에 관한 질문과 반론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내가 이 공동체에 내놓으려는 질문은 무엇이며, 나는 왜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타인에게 내 질문을 설명하려 하자, 그 질문을 갖게 된 나의 배경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좋은 질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지는 주체로서의 내가 어떤 상태와 위치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연구 주제를 정하고 매주 구체화해 나가는 수업을 듣고 있다. 나의 관심은 AI와 함께 성장하는 아동이 스스로 상상하고 판단할 기회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에 있다. 현재는 ‘오독하는 AI’를 구상하며,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는 AI의 응답을 받은 아동이 무엇을 유지하거나 바꾸면서 창작을 이어가는지 살펴보려 한다.

처음에는 AI가 일상에 들어온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질문하는 나의 위치를 돌아보니, 그 안에는 내가 지나온 경험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담겨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미술영재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는 서울교대 영재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직접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또 아이들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에 참여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내가 AI의 결과물만큼이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생각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생각하다 보니 대학원 입학 전 은사님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과거 예술의전당 미술영재아카데미에서 나를 지도해주셨던 교수님으로, 아동미술교육과 아동 심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오신 분이다. 어느덧 20년 가까이 이어진 인연이다. 함께 식사하며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이유와 당시의 고민을 말씀드렸고, 교수님께서는 르네 마그리트와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사례로 이야기해 주셨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곧바로 이해되었다. 익숙한 사물이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 놓일 때 우리는 그것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낯설다는 이야기는 처음에 쉽게 와닿지 않았다. 한국의 무속과 설화도, 아이돌이 무대에서 노래하고 팬들이 응원봉을 흔드는 풍경도 나에게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고서야 나는 그 익숙함 속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콘서트를 무속적 제의와 포개어 읽으면, 늘 보던 노래와 춤, 팬덤의 함성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나는 같은 영화를 보고도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다.

은사님과의 대화는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위치를 드러내 주었다. 스스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상태와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말도 이 경험을 통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배경을 파악하는 것에 더해, 그 배경 때문에 무엇이 잘 보이고 무엇은 보이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이 대화에는 지금의 연구에서 내가 관심을 두는 장면이 담겨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이 다른 관점과 만났을 때,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다시 바라보게 되는가. 은사님은 내가 알고 있다고 여겼던 대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의미를 짚어주셨다. 나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자신의 표현을 예상과 다르게 읽는 상대를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이어가게 될지 궁금해졌다. 원래의 뜻을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도 있고, 다른 해석을 받아들여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은사님이 건네신 다른 관점과 내가 구상하는 AI의 오독이 같은 것은 아니다. 오랜 관계 속에서 나눈 대화가 나에게 의미 있었다고 해서, 자기 뜻과 어긋나는 AI의 응답이 아이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는 생각을 이어갈 계기가 될 수도, 이미 한 말을 다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의미 있게 경험한 일을 연구의 가능성으로 삼되, 그 경험을 근거로 결과까지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질문하는 나의 위치를 살핀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도 함께 살피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내가 대학원이라는 공동체를 택한 것은 내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어서였지만, 무엇을 발전시켜야 하는지조차 혼자서는 충분히 알기 어려울 수 있다. 은사님과의 대화에서 그랬듯,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야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보이기도 한다. 나의 경험에서 시작된 질문을 타인에게 건네고, 그 응답 속에서 질문과 나의 관점을 함께 고쳐가는 것. 지금의 나는 그러한 과정을 연구라고 느끼며, 논문 쓰기를 통해 이 공동체에 참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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